
올해는 르완다 대학살 30주년이 되는 해 입니다.
30년 전인 1994년 4월 7일, 르완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나요?

평화로운 르완다의 농촌 전경
르완다는 1895년부터 독일에 의한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후 독일이 1차 세계대전 패망하고, 1916년부터는 벨기에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죠.
벨기에는 식민 통치를 원활히 하고,
르완다 내 부족들이 뭉쳐 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족을 분류하는 분할 통치를 했습니다.
이들이 부족을 나누는 방식은 참으로 단순했는데요
10마리 이상의 소를 가지고/ 코가 더 높고, 피부색이 옅은 이들은 투치족
10마리 미만의 소를 가지고/ 코가 낮거나, 피부색이 어두운 이들은 후투족으로 분류했습니다.
농경 부족이며 다수를 차지하던 후투족은
이 과정에서 많은 권리를 박탈 당하고 큰 규모의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반대로 유목 부족이며 소수이던 투치족은 사회의 우위를 점하는 지배 계급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죠.
1935년에는 이 두 부족을 식별하는 카드까지 발급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1,2차 세계대전 동안 축적되었던 사회 개혁에 대한 분노와 가톨릭 교회 내의 후투적 동정 여론에 영향을 받아
후투족 해방 운동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르완다의 인구 밀도는 1평방 킬로미터당 408명으로 아프리카에서 최고 수준이였는데요,
르완다 인구는 1934년 160만 명에서 1989년 710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이에 따른 토지 소유 경쟁도 심화되었습니다.
이런 상황들로 인한 두 부족간의 크고 작은 내전도 계속되었습니다.
복합적인 상황들로 인한 증오의 악순환은 르완다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죠..
마침내 1994년.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후투족 르완다 대통령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격추되어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추후 밝혀진 바로는 이는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이었어요.
하지만 이를 이용하고 싶었던 르완다 참모총장은
소수 지배계급인 투치족의 짓이라며 모든 투치족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을 시작으로 20세기 최대 비극이라 불리우는 제노사이드가 시작되었습니다...
1994년 4월과 7월 약 100여 일 사이 무려 80만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친절했던 이웃집 아저씨와 학교 선생님, 목사님이 하루아침에 저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어요.
저는 죽어라고 계속 달렸어요. 그들이 계속 뒤에서 제 이름을 불렀어요.
너를 꼭 죽이고 말겠다고요.
- 르완다 대학살 생존자 인터뷰 中
처음에는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언제고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다만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죽더라도 잔인하게 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요.
칼에 맞아 죽느니 차라리 총에 맞아 죽기를 바라지요.
돈을 주고 죽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대개 총으로 죽여 달라고 말할 겁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오히려 예삿일이다 보니 절로 체념이 되더군요.
싸울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습니다.
키갈리 이웃 도시인 카시루에서만 투치족 4,000명이 살해되었습니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한데 모여 앉으라고 말하더군요.
수류탄을 터뜨려 한꺼번에 살해할 생각이었던 게지요.
사람들은 모여 앉았습니다.
- 당시 대학살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던 로랑 은콩골리가 필립 고레비치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
이 끔찍한 학살극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40만 명이나 생겼고,
난민은 무려 2백만 명에 달했는데 대부분은 후투족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르완다인의 평균 수명은 단 1년 만에 1993년의 42.2세에서 1994년의 14.1세로
1/3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르완다의 인구도 내전 1년전이 1993년에 790.5만 명 이었던 것이
내전이 일어난 1994년에는 568.7만 명으로,
내전 1년 후인 1995년에도 568.7만 명을 기록하여
단 2년 만에 인구의 28%가 줄었습니다..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어제의 이웃이 오늘의 나를 죽이려 드는 현실을요...
다행히 르완다 대통령인 투치족 폴 카가메의 개혁으로
르완다는 안정되었습니다.
투치족을 끔찍하게 학살했던 후투족에 대한 복수를 금했기에 멈출 수 있던 일이었습니다.
(복수를 할래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해요.. 너무 많아서요..)
폴 카가메 대통령은 학살 명령을 내린 책임자들은 확실히 처벌했지만
일반 시민들은 용서를 구하면 돈이나 노동력으로 피해자에게 보상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놀랍게도 인류 최악의 제노사이드를 겪은 국가의 상처는 빠르게 봉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이후 카가메 대통령이 현재까지 르완다 대통령으로 독재 집권 중인데요..
모든 면에는 명암이 존재하기 마련이겠죠.

폴 카가메 대통령
르완다의 현 상황은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3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기에,
르완다의 어디에서나 과거의 참혹한 모습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르완다를 위한 열매나눔의 손길은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열매나눔 사업장의 르완다 사람들
천 개의 언덕을 지닌 아름다운 르완다를 위해 잠시 기도 부탁드립니다.
르완다의 이웃들이 소망을 품고, 자립하여 샬롬을 이루는 그날까지.
열매나눔의 노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Muraho. (안녕히 계세요)
올해는 르완다 대학살 30주년이 되는 해 입니다.
30년 전인 1994년 4월 7일, 르완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나요?
평화로운 르완다의 농촌 전경
르완다는 1895년부터 독일에 의한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후 독일이 1차 세계대전 패망하고, 1916년부터는 벨기에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죠.
벨기에는 식민 통치를 원활히 하고,
르완다 내 부족들이 뭉쳐 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족을 분류하는 분할 통치를 했습니다.
이들이 부족을 나누는 방식은 참으로 단순했는데요
10마리 이상의 소를 가지고/ 코가 더 높고, 피부색이 옅은 이들은 투치족
10마리 미만의 소를 가지고/ 코가 낮거나, 피부색이 어두운 이들은 후투족으로 분류했습니다.
농경 부족이며 다수를 차지하던 후투족은
이 과정에서 많은 권리를 박탈 당하고 큰 규모의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반대로 유목 부족이며 소수이던 투치족은 사회의 우위를 점하는 지배 계급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죠.
1935년에는 이 두 부족을 식별하는 카드까지 발급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1,2차 세계대전 동안 축적되었던 사회 개혁에 대한 분노와 가톨릭 교회 내의 후투적 동정 여론에 영향을 받아
후투족 해방 운동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르완다의 인구 밀도는 1평방 킬로미터당 408명으로 아프리카에서 최고 수준이였는데요,
르완다 인구는 1934년 160만 명에서 1989년 710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이에 따른 토지 소유 경쟁도 심화되었습니다.
이런 상황들로 인한 두 부족간의 크고 작은 내전도 계속되었습니다.
복합적인 상황들로 인한 증오의 악순환은 르완다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죠..
마침내 1994년.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후투족 르완다 대통령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격추되어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추후 밝혀진 바로는 이는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이었어요.
하지만 이를 이용하고 싶었던 르완다 참모총장은
소수 지배계급인 투치족의 짓이라며 모든 투치족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을 시작으로 20세기 최대 비극이라 불리우는 제노사이드가 시작되었습니다...
1994년 4월과 7월 약 100여 일 사이 무려 80만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이 끔찍한 학살극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40만 명이나 생겼고,
난민은 무려 2백만 명에 달했는데 대부분은 후투족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르완다인의 평균 수명은 단 1년 만에 1993년의 42.2세에서 1994년의 14.1세로
1/3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르완다의 인구도 내전 1년전이 1993년에 790.5만 명 이었던 것이
내전이 일어난 1994년에는 568.7만 명으로,
내전 1년 후인 1995년에도 568.7만 명을 기록하여
단 2년 만에 인구의 28%가 줄었습니다..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어제의 이웃이 오늘의 나를 죽이려 드는 현실을요...
다행히 르완다 대통령인 투치족 폴 카가메의 개혁으로
르완다는 안정되었습니다.
투치족을 끔찍하게 학살했던 후투족에 대한 복수를 금했기에 멈출 수 있던 일이었습니다.
(복수를 할래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해요.. 너무 많아서요..)
폴 카가메 대통령은 학살 명령을 내린 책임자들은 확실히 처벌했지만
일반 시민들은 용서를 구하면 돈이나 노동력으로 피해자에게 보상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놀랍게도 인류 최악의 제노사이드를 겪은 국가의 상처는 빠르게 봉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이후 카가메 대통령이 현재까지 르완다 대통령으로 독재 집권 중인데요..
모든 면에는 명암이 존재하기 마련이겠죠.
폴 카가메 대통령
르완다의 현 상황은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3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기에,
르완다의 어디에서나 과거의 참혹한 모습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르완다를 위한 열매나눔의 손길은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열매나눔 사업장의 르완다 사람들
천 개의 언덕을 지닌 아름다운 르완다를 위해 잠시 기도 부탁드립니다.
르완다의 이웃들이 소망을 품고, 자립하여 샬롬을 이루는 그날까지.
열매나눔의 노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Muraho. (안녕히 계세요)